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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리뷰

영화 박열 리뷰(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가네코 후미코)

by noeuli 노을이 2026.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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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일본 열도를 뒤흔든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조선인 수천 명이 유언비어 하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참극 한가운데서 오히려 법정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린 청년이 있었습니다. 영화 《박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권력 앞에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몹시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관동대지진, 재앙보다 더 깊은 상처

1923년 9월 1일 정오 무렵, 일본 사가미만을 진앙지로 한 관동대지진이 연달아 세 차례 일본 열도를 강타했습니다. 가장 큰 규모는 리히터 7.8에 달했고, 5분 간격으로 충격이 반복됐습니다. 마침 점심 준비 시간이었던 탓에 목조 가옥들이 연달아 불길에 휩싸였고, 대화재는 지진보다 더 광범위한 피해를 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2011년)이 발생하기 전까지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해로 기록된 이 지진으로 약 3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13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만 명 넘는 행방불명자까지 더하면 그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이름도 사연도 있는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재난이 불러온 공백과 혼란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일본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 폭탄 테러, 강도를 획책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유언비어란 사실 근거 없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거짓 정보를 의미합니다. 국가 기관이 공식적으로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유통한 셈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신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졌고, 물 부족과 화재로 극도로 불안해진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워갔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요약: 관동대지진은 자연재해를 넘어 국가 주도 유언비어가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인재(人災)였습니다.

 

조선인 학살, 기록되지 못한 죽음들

유언비어가 퍼진 뒤 벌어진 일은 재난보다 훨씬 잔혹했습니다. 자경단(自警團)이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치 방위 조직을 가리키는데, 관동대지진 이후에는 일본 군대와 경찰까지 가담하며 사실상 무고한 조선인을 집단 학살하는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죽창, 쇠사슬, 몽둥이, 총기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흉기가 됐습니다.

조선인 복장을 한 사람뿐 아니라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 중국인, 심지어 외국인까지 의심받아 살해당했습니다.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아기까지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당시 문헌에 남아 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알 수 없는 공포지만, 그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습니다.

희생자 수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7,509명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6,600명, 일본 측 일부 연구에서는 2,534명으로 추산합니다. 반면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233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2014년 한국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피해자 명단에는 318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고, 그중에는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15년 한국 정부가 "확정된 인원이 21명"이라고 발표했을 때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센 의문이 제기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기록: 7,509명
  • 한국 독립운동사 추산: 6,600명
  • 일본 측 일부 연구 추산: 2,534명
  • 일본 정부 공식 발표: 233명
  • 2014년 국가기록원 공개 명단: 318명(10세 미만 아동 포함)

일본은 이후 교과서에서 조선인 학살 관련 서술을 삭제하고 공식 보고서마저 왜곡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진실 규명보다 은폐를 택한 역사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제가 이 영화를 단순한 역사 드라마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입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요약: 조선인 학살 희생자 수는 수천 명에 달하지만 진상은 여전히 은폐와 축소의 벽에 막혀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국적보다 신념을 택한 사람

저는 영화를 보면서 박열보다 가네코 후미코에게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 국가 권력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1903년생인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3.1 운동을 목격하며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감명받았고, 아나키즘(Anarchism)에 눈을 떴습니다. 아나키즘이란 국가 권력과 모든 강제적 지배 구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삼는 사상입니다.

1922년 박열을 만난 그는 동거를 제안하며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함께 조직했습니다. 불령사란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일제가 불온하다고 낙인찍은 조선인들이 스스로 그 호칭을 역이용해 만든 저항 단체를 뜻합니다. 일제의 멸시를 오히려 무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름부터 이미 선언이었습니다.

1923년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법정에서도 기세를 꺾지 않았습니다. 조선 옷을 입고 조선어로 재판을 요구했으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태연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보인 태도는 담당 판사가 해임되고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는 파장을 일으킬 만큼 폭발적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수감된 피고인이 법정 구조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겨우 20대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망 경위는 끝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의 죽음이 어떤 형태였든, 신념 때문에 국적도 안전도 포기한 삶은 단순한 로맨스로 소비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약: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으로서 일제 권력에 맞선 아나키스트로, 그의 삶은 국적보다 신념을 앞세운 치열한 저항이었습니다.

 

박열, 잊혀진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1902년생인 박열은 3.1 혁명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간 뒤, 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식을 직접 설계했습니다. 『흑도』, 『후토이센진』 같은 잡지를 발행해 일본의 식민 통치와 사회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도 그였습니다. 1926년 일본 황태자 결혼식장 폭탄 투척 계획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22년 2개월을 복역한 끝에 1945년 10월 27일에야 석방되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일수록 교과서에서 한 줄로 처리되거나 아예 생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열이 그랬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에 이어 박열을 영화로 선택한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저항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윤동주가 시(詩)라는 언어로 시대를 증언했다면, 박열은 몸 자체를 던져 상징이 되었습니다.

석방 후 박열은 도쿄에서 신조선 건설 동맹을 결성하고, 김구의 부탁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을 직접 맡았습니다. 1949년 귀국했으나 한국 전쟁 중 북한에 납북되어 1974년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박열이 재판장에서 보인 태도였습니다.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신념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는 것. 타인의 시선과 불이익이 두려워 말을 삼키던 제게 그 장면은 작은 경종이었습니다. 아나키스트라는 사상적 배경보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다만 영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 아쉬운 지점도 있었습니다.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의 깊이를 다루기보다 법정 내 언쟁과 캐릭터의 유쾌함에 비중이 쏠린 느낌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의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열이라는 인물을 지금 이 시대로 소환해 냈다는 데 있습니다.

요약: 박열은 22년 넘는 옥고에도 신념을 꺾지 않은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로, 지금 다시 기억되어야 할 이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는 몇 명인가요?

A. 정확한 수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박은식 선생의 기록에는 7,509명,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6,600명으로 추산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는 233명에 불과합니다. 2014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명단에는 318명의 이름이 올라 있고, 열 살 미만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숫자 차이가 클수록 은폐의 흔적이 더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가네코 후미코는 왜 일본인이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나요?

A. 가네코 후미코는 3.1운동을 직접 목격하며 조선인의 독립 의지에 깊이 감명받았고,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모든 국가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민족이나 국적보다 앞선 것은 지배와 억압에 저항하는 개인의 자유였습니다. 박열을 만난 뒤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며 국적의 경계를 스스로 지워버린 삶을 살았습니다.

 

Q. 박열은 친일 전향을 했나요?

A. 수감 중 전향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 있었지만, 이후 조사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향서로 제시된 문서의 문체가 박열의 글쓰기 방식과 달랐고, 실제로 전향했다면 훨씬 이른 시기에 석방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는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야 풀려났습니다.

 

Q. 영화 《박열》은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충실한가요?

A. 영화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법정 투쟁,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 때로는 낭만적 로맨스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고,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의 깊이를 충분히 파고들지는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역사 드라마로서의 완성도와 사상 영화로서의 깊이는 별개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결론

영화 《박열》을 보고 나서 제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부당한 상황 앞에서 입을 여는 일에 조금 덜 겁을 먹게 됐다는 점입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두 사람의 기개가,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제 목소리를 삼키던 제 안의 무언가를 조용히 흔들어놓았습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아직도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희생자들의 이름은 여전히 불완전한 명단 속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질문입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꼭 한 번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역사를 아는 것과 그 역사가 빚어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aXROGpUc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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